이치 전투가 전개된 지역은 어떻게 범위를 설정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전투는 특정지역의 지상에서 벌어진 행위이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흔적이 남아 있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투 이전부터 축조된 성벽이나 진지가 존재하고 그곳에서 전투가 전개되어 그 흔적이 남아 있다면 전적지의 비정이 용이한 일이겠으나, 그러한 시설이 없는 곳에서 전투가 전개되었다고 한다면 전투지역을 설정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치 전투는 이치 영로 일원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금산의 일본군이 이치를 넘게 되면 호남의 수부인 전주는 물론 연산 공주 부여로 연결되는 호서의 남서부 또한 심각한 위기에 몰리게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전라도에서는 이 영로를 지켜야 하는 요충지였다. 이치 전투는 이러한 전략적 가치를 지닌 이치로 일본군이 침공해 온 것을 막아 싸워 물리친 전투이다. 따라서 이치 전투의 현장을 전해주는 가장 기 본적인 유적은 '이치 영로'라고 볼 수 있으며, 전적지의 위치와 범위는 이치 영로 일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치는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진산과 전주의 경계에 해당하는 고개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이치가 진산현의 서쪽 10리에 대둔산 남쪽에 있다고 기록되었다.
"대동지지" 의 전주 조에 이치는 전주의 양양소면과 진산현의 경제라고 되어 있으며, 진산 조에는 '이치는 서쪽 10리에 있으며, 전주 양양소면과 연산의 경제로 대둔산의 남쪽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대동지지 고산면 조에는 단원은 풍부 50리에 있는 진산로로 진산의 이치와 20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면 이치는 고산의 동북 50리에 위치한 탄천보다 20리가 더 먼 곳에 위치하 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진산군과 경계를 이루는 전주의 양양소면이 고산현을 넘어선 월경지이기 때문이었다. 고산에서 이치를 넘어 진산을 거처 금산으로 나가는 이 길은 1872년 진산현 지도에는 전주로 통하는 대로로 표기되어 있어서 조선시대의 중요한 역로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 이치는 충청남도 진산군 묵산리와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산부리의 경계를 이루는 금남정맥(노령산맥)상에 위치한 고개이다. 이치는 서북쪽 대둔산 자락과 그 동남쪽에 위치한 천등산으로 이어지는 험준한 산줄기 사이에 형성된 분수령을 넘는 고개길로 동남쪽과 북동쪽 계곡으로 이어지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치 영로는 북동쪽 금산군 진산면 방향이 남서쪽 완주군 산북리 방면보다 경사가 심한 편이다. 즉 완주군쪽의 영로의 기점이 되는 운주면 산북리 주암마을은 해발 고도가 약 150m 정도이고, 이치와 가장 근접한 기동마을은 해발고도 260m이며, 충남 쪽의 기점이 되는 진산군 묵산리의 해발 고도는 약 220m로 서 진산면 쪽이 더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이치의 북동쪽에 위치한 진산은 동쪽으로 금산으로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양촌이나 연산으로 연결되며, 북쪽으로 복수, 추부를 거쳐 옥천과 대전 방면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에 해당한다. 남쪽으로는 고당리를 지나 탄현을 넘어 용계 치를 넘어서 고산, 전주로 이어지는 대로와 장선리를 거쳐서 연산으로 나가는 소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이치는 전라도의 북동쪽에 위치한 금산군으로부터 북쪽과 서쪽으로는 영동, 대전, 연산, 양촌 등 충청도 남부 지역으로 연결되며, 남쪽으로는 고산 전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전적지 이전에 이치 영로의 옛길의 역사적 가치를 검토할 필요가 있 다. 이치 특히 고개의 옛길은 역사적 측면서 보면 국가 통치는 물론, 전라도와 중 청도를 연결하는 요충지으로서 주민과 물자의 이동 등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그 형태가 남아 있다고 한다면 이는 소중한 문화유산이 된다. 현재 이치에는 옛길의 모습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묵산리에서 지방천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정상 방향으로 300m 정도 가면 사계절 눈썰매장이 나오고, 여기에서 다시 500m 따라 올라가면, 대둔산 숲 속의 리조트가 계곡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리조트는 여기에서 약 400m, 즉 시작점으로부터 1.2km까지 이어지는데, 양편에 비교적 가파른 산으로 둘러싸인 협곡이지만 길은 아주 평탄하게 이어진다. 하지만, 이 길은 휴양시설 등의 이용로로 확대되어 옛길의 형태는 거의 사라졌다. 여기에서부터 이치 정상까지 약 500m 정도의 구간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신작로가 개설된 이후 폐기된 옛길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다.
전북과 충남의 도계를 이루는 이치의 정상부는 신작로 개설이후 국도 17도로의 확장, 휴게소 건립 등으로 상당한 절토 및 성토작업이 이루어져 그 형질이 심각하 계 변경되어 있다. 휴게소의 건물과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고, 그 옆에 철제 구조물로 경계 난간을 둘러 경계를 표시를 한 대지에 이곳이 이치 전적지임을 알리는 비석류들이 세워져 있다. 휴게소 쪽에 금산군수가 세운 이치전적지비와 김충선의 후손이 세운 이치전적지유허비로 표시된 사각기둥형 석주가 세워져 있다. 대지의 중간에 황진장군이현대첩비가 세워져 있으며, 그 남쪽 완주군으로 내려가는 쪽에 삼각형의 이치대첩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원래는 금산군수가 세운 비석과 함께 도로변에 작은 비석에 이치전적지라고 새겨져 있었으나, 이 표지석을 세운 후 철거하였다. 이 표지석 동쪽으로는 최근에 세운 무명병추모비가 위치하고 있다. 이 도로에 면한 대지 부근에는 종교단체에서 세운 돌비 2기가 세워져 있고, 그 앞으로는 대둔산 휴양림을 알리는 대형 간판이 세워져 있어서 이 대지마저도 가리고 있다.
이치 정상으로부터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의 개발 지구까지 내려오는 길은 약 500m 정도의 거리인데, 가파른 경사를 극복하기 위하여 서쪽 대둔산 쪽의 산기슭 을 감돌아서 형성되어 있다. 신작로 개설 이후 폐기되어 사용되지 않았지만, 옛길의 흔적이 완연히 나타나 있다. 그러나 개발단지로 내려오면 이미 옛길의 형태를 찾아보기 어려우며, 이 아래 기동마을로부터 주암마을까지는 이치에서 이어지는 옛길의 형태는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으나, 농지 조성과 농로의 확장 등으로 그 형태를 찾기가 어렵다.
따라서 현재 이치 영로상에 남아 있는 옛길은 진산 쪽 숲 속의 리조트에서 이치 상부를 지나 완주군 쪽으로 대둔산 휴양지 조성지역까지의 약 1km 구간이라고 할 있다. 이 이치 옛길은 이치 전투가 벌여졌던 전적지 설정의 가장 기본적인 표지 유
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전하는 기록상 이치 부근에서 전투가 벌어진 지점을 명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다. 다만 일본군의 침공에 대한 조선군의 대비, 그리고 일본군이 이치를 공격해 왔을 때의 전투 상황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일본군의 호남 침공이 금산에 침공했을 때 전라감사 이광은 이치와 웅치의 험지에 관군을 배치하여 수비 태세를 갖추었다. 아마도 이때 이치에는 처음 금산에 배치되었다가 고산으로 철수하였던 방어사 곽영의 군대가 배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들이 이치의 수비군들이 주둔하였을 가능성이 있는 곳은 웅치 정상부 능선으로부터 기동마을 부근 일대가 아닐까 한다. 이 일대에 주둔지와 관측소, 그리고 지휘소 등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웅치전투 이후 동복현감 황진과 광주 목사 권율이 이치로 달려가 일본군의 공격에 앞서 친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이 주둔하여 방어 태세를 갖춘 곳도 아마 앞에서 언급한 정상 부근에서 기동마을 일대에 걸치는 지역으로 생각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치 전투 이전에 전라도 관군이 금산성 공격을 위해 관군이 진 산 동원에 진을 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금산의 일본군이 이치로 공격하기 앞서 진산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이치로 퇴각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황진의 행장에 의하면, 안덕원에서 일본군을 물리친 다음 7월 10일 일본군이 다시 이치를 해서 공격해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이치로 달려가 후미에 진을 쳤는데 일본군과 가장 먼저 싸울 곳이라고 기록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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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대첩의 지형과 전투의 전개에 대한 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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